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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 및 요양제도

영국 NHS제도의 등장

by 째달이 2023. 2. 23.

영국의 NHS의 등장은 1942년에 발간된 베버리지 보고서가 그 이론적인 바탕이 되었지만 혁명적인 개혁의 결과가 아니라 기존제도의 점진적인 진보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NHS는 1911년 제정된 국민건강보험법을 계승한 결과라 하겠으며 의료서비스의 공적인 제공은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빈곤 구제의 차원에서 옛날부터 제공되어 왔던 오랜 전통을 갖고 있었다. 베버리지 보고서 역시 전통적인 사회제도를 토대로 작성되었다. 20세기 이전 영국의 의사들은 시장에서 제공되는 서비스에 대해서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의사들은 자기들의 환자를 위로하고 편안하게 하는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병원은 치료를 받는 곳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죽으러 가는곳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공적인 복지에 의존하는 사람에게는 돌봄과 의료서비스간의 구분이 힘들었고 또한 그러한 구분을 할 의미도 없었다. 영국의 의료사회화는 이렇게 빈곤의 구제라는 역사적인 기원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1911년에 입법화된 국민건강보험은 중하위층의 저소득 근로자를 위한 것으로 14세 이상 인구의 약 50% 정도가 가입되었고 저소득자는 구빈법에 의하여 여전히 보호를 받게 되었다. 

영국의 주요 관심사항은 빈곤의 원인으로서의 질병이었다. 그리고 소득을 획득하는 근로자가 주 관심이었지 그들의 가족은 대상밖에 있었다. 근로자들의 질병을 빨리 치료하여 사업장에 복귀시킴으로써 그들의 소득을 보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급여는 질병이나 장애에 따른 치료비와 상병수당이었다. 질병에 대한 치료에 있어서도 병원서비스는 급여에서 제외되었다.

영국의 국민건강보험은 독일에 비하여 늦게 출발하였으나 참가의사나 대상 근로자 모두에게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먼저, 참가의사들의 불평은 낮은 수가에 있었다. 즉, 당시 의사에 대한 진료비지불제도는 인두제를 택하고 있었는데, 1913~1945년간에 인두수가는 50%의 인상에 그쳤지만 환자들의 의사에 대한 방문횟수가 50% 증가하여 의사로서는 일만 많아진 결과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물가는 100%가 상승하여 결과적으로 의사의 실질소득은 반으로 줄어드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인두제 방식 하에서 의사들로서는 의료서비스의 질을 유지할 유인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과 관계없이 동일한 수가가 설정됨에 따라 최소한의 질만이 유지될 뿐이라는 점이다. 일반근로자들의 불평은 국민건강보험의 형평성 문제 주어졌다. 먼저 건강보험의 조합을 인가조합으로 함에 따라 임의적으로 가입자를 심사하여 병약한 위험군을 배제하고 건강한 집단만 선호함으로써 건강한 집단의 조합은 재정적 여유가 생겨 치과, 안과, 심지어 병원서비스까지 부가급여로 제공되나 병약한 위험집단에게는 최소한의 급여만 제공되었고 심지어 재정파탄의 위기까지 초래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또 다른 문제는 보험 적용환자의 서비스가 자비부담환자의 서비스에 비해 질적으로 열등할 것이라는 일반 국민들의 인식이다. 이러한 편견은 건강보험과 구빈 서비스를 동일 부처에서 관장하도록 정치적인 구조개편을 했음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끊임없는 제도 개혁요구가 있었다. 그 내용들을 보면 피부양자에 대한 적용 확대요구, 병원서비스와 전문의 서비스의 급여화 요구 등이었는데 이러한 개혁요구는 전국민에 대한 무료서비스라는 주장에 묻혀버렸다. 이 당시의 개혁 주장의 의료보장제도가 처음 고안될 당시의 이념이었던 근로자의 건강보호라는 차원을 넘어 의료서비스는 모든 국민이 누려야 할 하나의 권리라는 인식의 결과라 하겠다. 이러한 인식은 의료기술의 발달로 의료서비스의 효능이 향상되고 동시에 의료비가 증가하여 의료비 부담이 높아진데 연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의료보장을 둘러싼 이념적인 변화는 사회보장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구현되었으며 의료에서는 무료 이용의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념적인 변화에 따른 구체적인 영국에서의 개혁안들을 보면 1926년 처음으로 보험과는 별개로 공적 자금에 의해 지원되는 단일의 의료서비스를 요구하는 제안이 나왔다. 그리고 영국의 의사들은 인두제에 대한 불평이 많았은며, 진료비를 질병금고로부터 따로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재정사정이 나쁜 금고로부터 제때 진료비를 받는 것이 어려워 재정 지불 파이프 라인을 공적자금에 의하여 하나로 하는 것을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놀랍게도 1942년 영국 의사회는 정부 통제하의 중앙기획 공적 의료 서비스를 요구하는 중간 보고서를 발간하기에 이른다. 

영국의사회가 정부기획에 공적 의료 서비스를 주장한 것은 이러한 개혁이 기존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로 간주하였다. 같은 해에 유명한 베버리지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이 보고서는 지불능력에 관계없이 의료에 관해서는 포괄적인 서비스를 받아야한다는 주장을 하여 많은 국민들이 지지를 얻었다. 1944년 연합정부는 전 국민에게 강제적인 보험을 요구하는 백서를 발간하였다. 그 내용은 개인에 대한 치료는 개인이 직접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조달되는 재정에 의해 모든 사람이 보장받아야 하고 의사는 정부의 고용된 피용자여야하며, 또한 모든 병원은 국유화되고 국가 통제 하에 두어야 한다는 것으로 국가공영제인 국민보건서비스제도가 제안되었다. 이 제안은 희망하는 사람에게는 자비부담 서비스도 허용하여 선택의 자유도 동시에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다. 백서가 발표되자 전반적인 안에 대하여 30%의 의사만 찬성하였으나 포괄적 서비스의 무료 제공에 대해서는 60%의 의사가 찬성인데 반하여 나머지 37%의 의사가 반대하는 등 내용별로 찬반의 정도가 엇갈렸다. 그리고 대다수의 의사들은 국가가 운영하는 의료서비스에 대하여 반대를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백서의 제안이 진료에 있어서 더 좋은 조건을 얻게 될 기회로 간주한 기대감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의사들로 하여금 새로운 NHS제도를  마음으로부터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것은 정부의 과도한 통제와 이에 연유하는 진료상의 자유 및 경제적인 자유를 상실할 두려움 때문이었다. 의사들은 진료상의 자유와 경제적인 자유를 추구하기 위하여 정부의 피고용인이 되는 것보다 독립적인 계약자가 되기를 희망하였고 적용인구도 전 국민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90%의 인구로 엄격하게 제한하고 부유한 10% 국민들은 자비부담 환자로 두기를 희망하였다. 

1945년 노동당에 의한 단독정부가 구성되고 보건부 장관이 취임하자 의사들을 설득하는 일을 시작하여 1946년도에 NHS제도를 입법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사회보험형태로 의료비의 재원을 조달하는 사회보험제도가 아니라 국가의 일반재정으로 의료재정을 조달하는 NHS제도의 전환이기 때문에 적용인구를  90%로 제한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보건부 장관은 일반의와 전문의의 이해가 다른 점을 이용하여 분리접근책을 구사하였다. 

먼저 병원 근무 전문의들은 이미 병원에 봉급제 의사로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의에 비하여 봉급제 고용에 대해 큰 불만이 없음을 알고, 첫째, 그들에게 개업하여 자비부담환자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병원 시간제로 근무를 허용한다는 것과, 둘째, NHS병원의 병실 일부를 자비부담환자를 위하여 사용토록 허용하는 자비부담병상제도를 도입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의에 대하여도 두 가지를 약속하였는데, 첫째는, 정부의 봉급제 의사 대신 독립적인 계약자 신분을 허용하되 진료비 지불방법은 국민건강보험에서 사용하던 인두제 방식을 유지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의사들이 은퇴할 때 그들의 진료에 대한 공헌을 보상키 위해 일정액을 적립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1944년 백서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찬성하던 의사들이 NHS법안이 마련되자 의사들은 장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NHS제도에 대하여 반대하는 모순을 보였다. 1948년 3월에 실시된 의사들에 대한 여론조사결과 89.6%의 의사가 NHS제도에 대해 반대 의사를 보였고 심지어 55.6%의 의사들은 진료활동을 포기하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1948년 7월5일 영국은 새로운 제도인 NHS제도를 실행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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