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강보험 1988년 1월 농어촌지역 의료보험이 실시되면서 의료보험에 대한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특히 농민들은 과다한 의료보험료 책정에 대해 반발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보험증을 반납하거나 보험료 고지서를 불태우는 행동을 보였다. 농민의 문제 제기가 계속되자,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활동을 하고 있던 진보적 보건의료단체들이 이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48개 단체가 참가한 전국의료보험대책위원회는 10월 국민의료보장법을 채택했는데, 주요 내용은 의료보험을 통합 일원화하고, 보험료는 소득에 따라 부과하되 고소득자에게는 누진율을 적용하고, 의료보호와 의료보험을 통합하는 것 등이었다.
보건사회부는 거의 1천만 명에 이르는 도시지역 피보험자들에 대해 110개 시, 구 단위의 도시지역의료보험조합으로 나누어 보험을 적용하려고 했으나, 시, 도 단위의 광역조합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는 집권 여당의 반대에 부딪혔다. 1988년 2월 들어선 새 정부에서 의료보험을 통합하려는 계획이 흘러나오고, 1988년 들어 농어민과 근로자, 의료전문가들이 중심이 된 통합을 위한 의료보장개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면서, 정부와 야당은 각자의 법안을 내놓았다. 정부와 공화당은 광역조합방식을, 야당은 계약제를 원했다. 평민당과 민주당은 심사기관으로 공단을, 의협과 공화당은 제3의 기구를 제안하는 등 사안마다 담고 있는 내용이 달랐다.
여소야대의 정국 하에서 시민단체의 세 야당 당사 점거농성, 3당 당수의 긴급회동에 이어 최종적으로는 통합주의의 내용을 담은 국민의료보험법이 1989년 3월 만장일치로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이 법안은 보험수가심의회 신설, 일정 소득 이상자에 대한 보험료 누진율 적용, 진료비심사원 신설, 자영업자 보험료에 대한 국고지원 등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직장인의 부담 증가 문제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논조가 계속되자 마침내 1989년 3월 노태우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하게 되었고, 결국은 7월 전국민의료보험이 조합주의의 원칙하에 진행되기에 이른다. 이에 반발하는 의료보험대책위는 거부권 행사를 비난하고, 국회의 재의결을 이루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였다. 의료보험대책위는 이 운동이 농민이나 보건의료인만의 협소한 운동이 되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노동자와 도시빈민 등 각계각층의 참여하는 의료보장 쟁취 공동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하지만 정계 개편으로 여소야대 국면이 소실되면서 결국 이러한 운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끝나게 되었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발하자 통합논의가 재현되었다. 기존의 조합들을 하나의 보험자로 통합하는 이러한 통합개혁의 추진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그룹은 1994년 출범한 의료보험통합일원화와 보험적용확대를 위한 범국민연대회의 이었다. 총 22개의 보건의료단체, 노동단체, 농민단체, 시민단체가 참여했다. 의보연대회의의 설립 목적은 의료보험 조합을 통합일원화하고, 보험적용을 대폭 확대하며, 공평한 보험료 부담으로 사회적 형평성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1997년 10월 대통령이 여당인 신한국당을 탈당한 상황에서 신한국당의 황성균 의원은 통합안을 발의하게 되었고, 1997년 11월 이에 따른 국민의료보험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통합이 추진되게 된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의료보험통합을 100대 국정과제중의 하나로 선정하고, 1998년 의료보험통합추진기획단을 만들어 통합의 구체안을 마련했다. 이에 따른 통합작업은 크게 3단계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1단계는 1998년 10월부터 진행되어 227개의 지역조합의 재정이 통합되고 지역조합과 공무원, 교직원 공단이 하나의 보험자인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으로 통합된 과정이다. 2단계는 2000년 7월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과 140개 직장조합을 통합하여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설치하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독립하는 과정이다. 3단계는 2003년 1월 재정 통합을 이루는 과정이다.
통합주의자들은 사회보험제도로서의 의료보험의 목적을 연대의식을 통해 사회적 통합을 얻는데 있다고 보고 조합 방식은 임의보험적 성격이 강하여 사회적 연대성을 저해하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에 조합주의자들은 의료보험이 소비자 주권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지방자치라는 역사적 방향에 맞게 발전되어야 한다는 점과 보험이라는 재원조달 수단이 지속되는 한 의료보험체계는 피용자 의료보험과 자영업자 의료보험의 이원적 체계 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합방식이나 통합방식 어느 것이 시대적으로 옳았다고 할 수는 없다.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어 확대되는 초기에는 원래 통합 방식에 의한 진행이 가능하지 않았다. 최소한 1차 통합논쟁이 있었던 시기에는 통합방식에 의한 제도 운용은 제도의 확대에 장애요인이 될 소지가 컸다. 통합 운영을 통해서 진정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면 전산 등의 인프라의 구축이 필요해지는데 당시로는 이를 위한 여건이 되어 있지 않았다. 통합주의론자들은 통합만 되면 직장가압자의 재원을 통해서 지역주민의 의료보장을 실현할 수 있고 이러한 소득재분배를 통해 사회의 형평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직장가입자의 확대를 통해서 의료보험제도의 틀을 갖추어 가야 하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방안으로는 직장인들의 동의를 얻어내기 힘들었다.
직장인들을 위한 의료보험이 틀을 갖추고 전산 인프라가 갖추어지기 시작하면서 여건은 통합운영의 장점이 나타날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고 있었다. 더욱이 난립하는 소규모 조합의 재정악화, 조합사이의 형평성 문제 등이 대두되면서 통합 운영의 필요성이 커지고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 보험료 부과방식의 통일이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었지만 이는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것이다. 서로 다른 여건하에 있는 직장과 지역가입자들에게 단일의 부과방식은 오히려 불평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며, 여건이 다른 대상에게는 다른 부과방식을 적용함으로써 부담 결과의 형평성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득파악의 정도가 현격히 다른 그룹을 구분하지 않고 단일의 부과방식을 적용하는 것 자체가 형평성에 맞지 않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단일부과방식이 불가능하니까 통합이 안 된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단일부과방식이 바람직하고 가능하니까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논쟁의 마지막 시점에 이르면 조합주의자와 통합주의자 사이의 논쟁은 이미 논쟁을 위한 논쟁 내지 자존심 싸움의 양상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시점에서 이상론을 주장하면서 논쟁을 유발하는 것이나, 여건이 변화했음에도 과거의 주장에 얽매이는 것 모두 불필요한 사회적 낭비를 초래했다는 것이 긴 통합논쟁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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