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부터는 건강보험 강제적용이 100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 이후 설치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확대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업장 확대는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서 1983년에는 16인 이상 사업장으로, 1988년에는 5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직장 적용자의 확대는 경제성장에 힘입어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으나, 계속되는 과제는 어떻게 직장이 없는 국민에게 의료보험을 확대할 것인가 이었다. 자영업자들은 의료보험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사회의 갈등 요인이 되고 있었다. 의료보험의 적용은 보험료를 직장의 고용주가 절반 부담해 준다는 것 이외에도, 보험 적용을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일반수가보다 낮은 보험수가를 적용받게 된다는 점에서 큰 혜택이었다. 처음 실시되었던 1977년에도 보험수가 대비 일반수가는 1.4배의 수준이었는데, 보험수가와 일반수가의 격차는 1980년대가 되면서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이 더욱 필요했던 전두환 정부로서는 이를 해결하여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관건은 소득이 불분명하게 노출되는 이들에게 보험료를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부과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81년부터 강원도 홍천, 전북 옥구, 경북 군위에서 지역의료보험 1차 시범사업이 시작되었다. 목포만이 도시 지역이고 나머지는 모두 농어촌 지역이었다.
시범사업에서 얻어진 경험을 바탕으로 1988년 1월부터는 농어촌 지역에 의료보험이 시작되었다. 보험 가입은 가족단위로 이루어졌다. 즉, 가장이 가입자로 보험료를 내고 피부양자가 함께 보험혜택을 보게 되는 형태이다. 이를 위해 군 단위로 134개의 조합이 조직 되었다. 1989년 7월에는 우여곡절 끝에 110개 시, 구 단위의 도시지역의료보험조합이 설립되어 거의 1천만 명에 이르는 도시지역피보험자들에 대해 보험급여가 시작됨으로써 사회보험으로서의 의료보험이 시작된 지 12년 만에 전국민의료보험이 달성되게 되었다.
이렇게 단기간에 이룩한 전국민 의료보험은 분명히 대단한 성공사례이다. 어떻게 이러한 점진적 개혁이 그러나 서구 국가의 경험에서 볼 때는 급진적 개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짧은 기간 내에 가능했을까?
흔히 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친 빠른 경제성장이 원인으로 거론된다. 이러한 경제성장과 이를 통한 보험료 납부 능력의 형성은 물론 건강보험 형성의 필요조건이 될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같이 한국보다 경제적 여건이 훨씬 좋으면서도 그러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국가를 생각할 때 경제성장이 충분조건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통령의 정치적 리더십과 관료의 기술적 리더십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군 출신 대통령들이 정권쟁취의 명분을 사회통합에서 찾으려 했고 더욱이 당시까지의 권위주의적 정치문화는 이들의 의지대로 사회의 각계각층이 따라가게 했다. 행정적 기술관료들도 이러한 권위주의 문화의 수혜자이면서 순응자로서 학자와 일반인들을 리드해 나갔다. 최소한 의료보험의 도입 및 확대 단계에서는 이들 정치가와 관료의 역할이 컸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의료보험 조합의 통합 논의는 정치적인 양상을 보이면서 오래 기간 계속되었다. 이는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 20년에 걸친 건강보험제도의 핵심 이슈이었고 거의 모든 사회단체와 이익집단들이 자기의 견해를 표명할 정도로 광범위한 논쟁거리였다. 관리운영체계라고 하는 것이 어찌 보면 형식에 해당할 수 있는 것인데 이를 둘러싸고 이렇게 논쟁이 전 방위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독특한 사례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1979년으로 예정된 300인 이상 사업장으로의 적용 확대는 적정한 조합규모가 얼마인가 하는 문제로 이어졌다. 전국의료보험협의회는 피보험자 2,000명 이하의 조합들을 공동조합으로 묶고 점차 10,000명 이상으로 확대할 것을 제안했고, 보건사회부는 일단 3,000명 미만의 조합을 통폐합한다는 계획을 확정하고 시행에 들어갔으나, 전두환 대통령이 들어서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해체되면서 통폐합 작업은 유야무야 되고 조합 92개가 줄어드는데 그쳤다.
1980년 새로 부임한 보건사회부장관은 전국의료보험협의회와 공무원과 교직원을 일원화하는 방안을 추진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전국의료보험협의회가 통합주의에 반대하는 조합주의의 논리로 대응을 했고, 이는 기나긴 조합의 통합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협의회의 반대 논리는 일원화를 하게 되면, 정부의 재정 부담이 가중되며, 의료자원이 도시지역에 편중된 상황에서 일원화는 형평성에 위배되며, 노사 간의 연대의식이 약화되며, 알뜰한 재정관리의 장점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보건사회부 내에서도 일원화 방안에 대해 반대하는 공무원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신임 장관에 의해서 추진되었고 보사부 내의 일부 관료가 지지했던 일원화 방안은 대통령의 재검토 지시로 일단락된다. 이것이 전두환 정부 하의 1차 통합논쟁에 해당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의료보험 심사기구를 신규의 의료보험조합연합회로 일원화 하고 전산시스템을 통합 운영하는 변화가 있었다. 1983년에는 보사부 내에서 통합방안을 추진했던 일부 관료들이 옷을 벗게 되는 소위 의료보험 파동이 생기게 되는데 이는 통합주의가 당시의 군사정부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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